- 한 권도 되지 않는 할머니 이야기

6월.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얼음 틀'에 얽힌 할머니의 기억을 풀어내던 중에 접한 소식이었다. 다른 인생을 살아온 두 분의 마지막 계절. 인생의 단편이 이토록 우연히 겹치는 일은 드물 텐데, 끝을 향해 가는 할머니 이야기가 이렇게 덧씌워진다. 외할머니는 몇 년간 치매를 앓으셨다. 농사일로 허리가 굽은 지는 이미 오래되었고 마른 몸은 늘 연약해 보였으나,...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어떤 물건이나 상황에서 연상된다. 기억 속 누군가를 떠올리는 방식은 누구나 다 비슷할 것이다. 머릿속에 문득 장면이 떠오르고, gif 처럼 소리 없이 압축된 기억이 흘러간다. 6월. 계절이 바뀌며 여름이 시작되고 있다. 나는 찬장에 묵혀둔 얼음 틀을 씻으며 여름을 맞이한다. 얼음 틀에 정수된 물을 붓고, 칸칸이 고르게 들어갈 수...

할머니와 얽힌 이야기로 염소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동네에 살던 동물들이 하나둘 생각났고, 쓰다 보니 글을 줄일 수가 없었다. 우리 집 어른들은 동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가축으로 키워본 것은 개뿐으로, 그마저도 아주 짧은 시간만 우리 집에 머물렀다. 나는 인간 이외의 동물과 유대 관계를 맺어본 경험이 드물고 아직도 그들이 낯설다. 내 인식에 인간과 그들은...

대여섯 살 무렵 가족들이 주로 생활하던 예전 집은 무너트려 새 집을 지었는데, 그 옆에 시멘트 벽돌로 지은 세 칸짜리 별동은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별동은 작은 방 하나와 창고, 수세식 화장실이 딸린 일자형 건물이었다. 엄마 말로는 아빠가 어릴 때(정확하게는 고등학생 시절 정학을 당한 시기에) 인부들과 함께 지은 집이라고 했다. 가장 왼쪽의 미닫이문을 열고...

지역 어른들은 종종 우리 동네가 크고 사람이 많다고 했다. 마을을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큰길을 기준으로 왼쪽 오른쪽을 나누어 지명을 따로 부르기도 했으니 물리적으로 꽤 큰 편인 건 알겠으나, 다른 곳에 살아본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가구의 숫자나 인구 밀도 같은 것이 쉽게 체감되진 않았다. 다만 마을 안에 중학교가 있고 그중 절반이 동네 아이들이었던 것을 생각...

논과 밭으로 이루어진 너른 앞들, 바다와 가까운 변의 중앙에는 작은 절이 있다. 마을을 통과하는 중앙도로에서 내려다보면 너른 들판에 외따로 자리한 절이 금방 눈에 띈다. 마을의 형세는 절을 중심으로 마치 동심원을 그리는 듯하다. 집 한두 채 정도 크기밖에 되지 않는 작은 절을 둘러싼 너른 들판. 마을의 북쪽과 남쪽을 호선으로 잇는 소로와 그 길을 경계로 빼...

남해의 섬들은 멀리서 보면 작은 산이 바다 위에 떠 있는 것 같다. 시골이라고 하면 논밭이 이어진 너른 평지에 옹기종기 모인 집들이 떠오르겠지만, 내가 나고 자란 섬 동네는 산의 비탈면이 바다까지 이어지는 구릉지에 자리 잡고 있다. 산은 말굽 모양처럼 동네의 삼면을 둘러싸고 있는데, 주도로와 정류소가 산허리에 있어서 외부로 나가려면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야 ...

10살 무렵까지 나는 비쩍 마른 아이였다. 목욕탕에서 때를 밀어주며 엄마는 가끔 한숨을 쉬었는데, 핏기없는 입술과 칙칙한 피부톤이 빈혈과 여타 자질구레한 건강상의 문제일 것이라는 확신을 하셨던 것 같다. 10대 때는 몇 번 정도 주기별로 한약을 지어 먹었다. 지금이야 보조제를 먹으면 다음 날 몸이 가뿐한 것을 금방 느낄 수 있는 나이지만, 그때는 워낙 어려...

아빠는 3형제 중 장남이다. 엄마는 4남매 중 외동딸이다. 이는 곧, 나에게 고모나 이모가 한 명도 없다는 뜻이다. 마을에는 할아버지의 형님인 큰할아버지도 살고 계셨는데, 그 집의 5촌 당숙들은 5형제다. 할아버지의 자매분들은 오래전에 다른 지역으로 시집을 가셨으므로 여자 친척은 한 분도 만나 뵐 기회가 없었다. 나는 제일 처음으로 태어난 손녀인데, 지역과...

고향 집은 붉은벽돌로 지어진 단독주택이다. 시멘트를 부어 평평하게 고른 마당과 동백나무가 심긴 작은 텃밭까지가 우리 집이다. 담 넘어 1분 거리에는 숲이 있고, 숲을 지나면 코앞이 바닷가다. 마을을 둘러싼 U자형의 산줄기 끝에는 바다를 안은 두 팔처럼 두 개의 방파제가 설치되어 있다. 빨간 등대와 하얀 등대는 번갈아 가며 빨간 불, 초록 불로 바다를 비춘다...

집에는 주인을 알 수 없는 빨간색 맥가이버칼이 있었다. 그것은 손톱깎이나 귀이개, 니퍼 같은 잡동사니처럼 집구석 아무 데나 놓인 채로 돌아다니던 물건 중 하나였다. 지금은 고향 집에 가도 그 맥가이버칼을 찾아볼 수 없는데, 내 주변에도 요즘 그런 물건을 집에 두는 사람은 보지 못한 것 같다. 맥가이버칼은 아빠의 소유물도 아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 물건...

입학하고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이름이 바뀌던 즈음에, 부모님은 할머니 할아버지로부터 독립하고 차로 20분 거리만큼 떨어진 동네에 집을 얻었다. 이사한 곳은 12층짜리의 신축 아파트로 그 근방에서는 지금까지도 유일한 고층 아파트다. 아파트는 할머니 할아버지 집보다 바다가 더 가까운 곳에 있어서, 1층 주차장과 담벼락만 지나면 시멘트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