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밤 잘 가. 갈림길에서 너는 나의 찬 손을 한 번 쥐어주고는 돌아선다. 가을 바람에 들뜬 것이라기엔 너무 시리고 가을 밤의 정취라기엔 너무 쓸쓸하다. 너는. 나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이런 짓을 해?
졸음 바르르 눈꺼풀이 슬라이드처럼 감기면 이번의 꿈, 다음의 꿈, 그 저번의 꿈, 먼 훗날의 꿈 침잠하는 중력에 저항하며 문을 골라 잠깐만 나는 저 너머에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
거울 왼쪽 모서리부터 대각선으로 곡률을 따라 읽히는 노골적인 이야기 나의 단편
목적지 사람들은 원대한 목표, 그럴싸한 위치에 도달하려 발버둥 치지만 인생에 죽음 외의 목적지 따윈 없다 모두, 발이 머무는 곳에서 편히 쉬어야 할 텐데
구름 사이로 열대의 땅으로 향하는 비행 나설 수 없는 단단한 창 밖으로 적층한 거대한 구름과 그 위의 구름 사이로 펼쳐지는 열락의 광경 미처 도달하지 못하였으나 존재하는 줄은 내 이미 알고 있었지 그곳은 모든 신들의 고향 신화가 분연히 나고 지는 황홀경
선물 내게는 혀가 저릴 달콤한 간식이나 단 며칠 싱그럽게 피어있을 꽃을 부탁해요 당신이 떠나고도 오래도록 낡아가는 마음을 지켜볼 자신은 없으니까요
감추다 진실을 두 손으로 움켜쥐어 입 속으로 밀어 넣는다 풀어내지 못한 비밀은 마음속을 빙빙 돌다가 깜깜한 어둠 그 어드메에 뜨겁게 이는 항성이 되어 울컥 떠밀려 나오지 못하고 가슴에 박혀 우주를 흔든다
믿어주다 믿을 允 자를 갓난아이에 조어하며 어머니는 무슨 꿈을 꾸었나요 동년배 여자애들과 공유하는 이름 끝 자는 그저 장식에 불과하니 당신이 부르고자 했던 내 진정한 이름은 믿음이겠지요 나는 날 때부터 의지 받은 이 인생이 조금 가여웠습니다
지예는 무난한 사람이었다. 세상에는 자기 힘으로 될 일과 안 될 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삶에 적당히 타협할 줄 알았다. 기본적인 매너와 예의를 갖추어 무심결에 타인에게 상처 주거나 스스로 상처 받는 일은 피했다. 개인적인 취향을 드러내는 일을 삼가고, 비죽이는 머리를 예초기로 깎아낸 고른 잡풀 같은 인생을 사는 것이 그녀의 삶의 목표였다. 그러나...
촌스러운 명사의 절반 이상이 모르는 외래어와 상표로 쓰인 남의 글 하나를 읽으며 내가 이 세상의 반쪽도 쫓아가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무언가가 여느 사람들의 기호가 되어 간다 세상이 언제 이렇게 세련되어졌는지 곰곰이 생각하다 나는 역시 좀 촌스러운가, 스스로를 반추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라는 말은 입 밖으로 내기 위한 문장은 아닌 것 같았다. 모든 자음과 모음이 입술 여기저기를 비죽이며 찌르다 후드득 발 밑으로 떨어져 버리고 말 것처럼 생겼다. 고인에 대해 알은체를 하기에 나는 그의 아버지와 너무 아무 관계도 아니었다. 나는 동네도 사람도 떠나버린 지 너무 오래되었고, 부옇게 바란 오래된 기억 속 그 어른의 모...
솔직함 나는 닳고 닳은 인간들과 어울리고 싶어요 그렇고 저런 상호작용에 마모되어 관계의 경계로부터 한참 후퇴하여 품 안에 자기를 껴안고 동그랗게 빚어져 남들을 해칠 이유도 여유도 없는 인간들이라면 언제고 우리의 거리를 인정하며 그저 서로를 이해할 뿐인 다정한 사이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소설, 시, 에세이를 주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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